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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스턴의 사인 훔치기, '예고된 참사'

작성자
ac24
작성일
2019-11-16 02:26
조회
378



2017년 월드시리즈 우승팀 휴스턴 애스트로스가 그해 전자 장비를 사용해 사인을 훔쳤다는 내부 고발이 나오면서 메이저리그가 충격에 빠졌다.

미국 유료 스포츠전문 매체 <디 애슬레틱>의 메이저리그 칼럼니스트 켄 로젠탈은 13일(한국시간) "현역 투수인 마이크 파이어스(34·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포함해 2017년 휴스턴 소속으로 뛰었던 선수 4명이 해당 시즌 휴스턴이 홈 경기가 열릴 때마다 외야석에 위치한 카메라를 통해 사인을 훔쳤다고 증언했다"고 보도했다.

2017년 휴스턴이 사인을 훔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단순했다. 그들은 홈 구장 외야석에 카메라를 설치한 다음, 해당 카메라로 찍은 영상을 클럽하우스와 더그아웃 사이 통로에 설치된 모니터로 보내 사인을 분석했다. 이후 상대 투수가 변화구를 던질 때마다 '소리'를 통해 타석에 선 타자에게 알려줬다. 가장 많이 쓰인 방법은 통로에 있는 쓰레기통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디 애슬레틱>은 해당 보도에서 휴스턴이 외야석 카메라를 통해 사인을 훔친 시기를 2017년으로 특정지었으나, 메이저리그 현지 팬들의 제보에 의해 '2019시즌에도 휴스턴이 사인을 훔친 것으로 판단되는 정황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
사실 '사인 훔치기'는 메이저리그를 포함한 모든 프로 야구 경기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벤치 내부, 베이스코치 및 주자가 타자에게 상대투수의 구종 등의 전달 행위를 금지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KBO리그와는 달리, 메이저리그에는 '육안으로' 사인을 훔치는 행위를 제재하는 마땅한 규정이 없다.

그러나 예외는 있다. 바로 전자기기와 그라운드 밖 직원을 통한 사인 훔치기다.

투수와 포수의 사인교환으로부터 시작하는 종목의 특성상 이를 용인할 경우, 야구는 '정정당당하게 선수 대 선수의 기량을 겨루는 스포츠'가 아니라 '도청 및 도촬이 판을 치는 산업 스파이들의 첩보물'이 되어버린다.

투수가 어떤 구종을 던질지 알고 치는 것이 타자에게 얼마나 유리한 지는 야구팬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다. 그게 경험을 통한 추측에서 나왔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타자(또는, 팀)의 승리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전자 장비를 통해 사인을 훔치는 것은 우리에게 친숙한 <스타 크래프트>로 비유하자면 '맵 핵'을 키고 하는 것이다.

만약 프로게이머가 불법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경기에 승리했다면 그는 영구제명되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하물며 그 행위를 구단(또는, 선수단) 차원에서 지원했다면 해당 사건은 구단 해체를 넘어 리그의 존폐를 논할만한 상황으로 번졌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비슷한 상황에서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대응은 지나치게 물렀다.

즉, 현재 터져 나오고 있는 휴스턴발 '사인 훔치기' 논란은 예고된 참사에 가깝다는 것이다.
사실 논란의 시발점이 된 2017년은 보스턴 레드삭스가 '스마트 워치'를 활용해 사인을 훔친 것이 드러난 해이기도 하다. 당시 보스턴은 그라운드 외부에 있는 영상 분석관이 스마트 워치를 통해 더그아웃 내부에 있는 트레이너와 일부 코치에게 포수 사인 등의 정보를 전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징계를 받았다.

한편, 같은 해 뉴욕 양키스 역시 보스턴으로부터 구단 중계 카메라를 활용해 사인을 훔쳤다는 문제 제기를 받았다. 사무국은 이런 보스턴의 의혹 제기를 '증거 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조사 과정에서 불펜 전화를 '사인을 훔치는 용도'로 활용한 의심스러운 정황이 발견되면서 양키스 역시 징계를 받는 해프닝이 있었다.

문제는 보스턴과 양키스의 해당 행위에 대한 징계가 '알려지지 않은 액수의 벌금'에 그쳤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2017년 휴스턴의 행위에 대한 중징계가 이루어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2019시즌을 앞두고 관련 규정을 재정비하면서 '전자 장비를 사용해 사인 훔치기'에 대한 징계를 강화했다는 것이다. 바뀐 규정에 따르면 전자 장비를 사용해 사인을 훔친 구단은 이듬해 신인 드래프트 지명권 및 국제 유망주 계약금 슬롯의 일부가 박탈된다.
이 역시 저지른 잘못에 비해선 가벼운 징계이지만, (단순히 벌금 수준에 머물렀던 이전에 비해선) 구단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는 역할은 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따라서 이번 사건 조사에 있어 핵심은 2019시즌에도 휴스턴이 전자 장비를 사용해 사인을 훔쳤는지 여부가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현지 커뮤니티에서 수집된 자료들만 살펴보더라도 휴스턴은 새로운 규정에 의거한 징계를 피하기 힘들어 보인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메이저리그 팬덤 내에서 '전자 장비를 사용해 사인 훔치기'에 대한 비난이 휴스턴 한 팀에게만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휴스턴이 사인 훔치기 이전에도 과도한 탱킹을 비롯해 에이큰 사태·스프링어 콜업 논란·오수나 영입 및 타우브먼 사건 등 수많은 논란으로 미운털이 박힌 구단인 탓이 크다.

그러나 이미 2년 전에 보스턴과 양키스가 비슷한 사건으로 징계를 받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전자 장비를 활용한 사인 훔치기'는 단지 휴스턴 한 구단의 문제가 아니라, 메이저리그 전체에 유행처럼 퍼져있을 확률이 크다. 따라서 이에 대한 사무국의 적극적인 수사망 확대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2017년 당시 휴스턴의 사령탑이었던 A.J. 힌치 감독뿐만 아니라, 벤치 코치였던 알렉스 코라(現 보스턴 감독)과 최고참 가운데 1명이었던 카를로스 벨트란(現 뉴욕 메츠 감독)으로 수사망을 확대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움직임으로 보인다.
과연 사무국은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던 2년 전과는 달리, 적극적인 수사망 확대와 강력한 징계로 메이저리그를 좀먹고 있는 '전자 장비를 활용한 사인 훔치기'를 근절해낼 수 있을까?

직업을 떠나 한 명의 팬으로서 메이저리그가 정정당당하게 선수 대 선수의 기량을 겨루는 무대로 돌아오길 바라본다.